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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전 2025 관람기

1. 서론

강남의 K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괴짜전 2025' 전시를 보고 기록을 남긴다.

다소 아쉬운 점이 많은 전시였다.

왜 작품의 이름을 적어놓지 않는지 알 수가 없는 전시이기도 했다. 작가의 이름만 덩그러니 적어 두면, 작품 향유가 원활할리가 있나? 이 전시장을 구성한 큐레이터가 존재한다면 꼭 만나보고 싶다.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다.

2. 본론

2.1. ? Rio Jee(1986)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이것이다.

Rio Jee(1986)

위의 이미지는 압축하지 않았으니, 확대해서 감상할 수 있다.

꽤나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개별 작품의 이름을 정말로 알고 싶은데, 전시장에 눈 씻고 찾아보아도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너무도 아쉽다.

캡션은 다음과 같다.

"드로잉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낙서는 마음을 바라보는 것이다."

리오지 작가는 낙서를 통해 내면을 마주하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자신과 만난다. 그의 작업의 세계관이자 삶의 모토인 '리오피아(RIOPIA)'는 사람다움과 아름다움, 사랑과 자유가 모든 순간에 스며드는 세계이자, 작가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다. 낙서는 그 삶에 가까워지기 위한 조용한 자문이며, 마음의 방향을 따라 천천히 흘러가는 여정의 기록이다.

ALWAYS RIOPIA.

흥미로운 지점은 낙서가 내면의 투영이라는 인식이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낙서를 하곤 한다. 그 낙서에는 현재 '나'의 생각이 묻어난다. 딱히 새로운 생각은 아니지만, 그것에 천착하여 작품세계를 확장해 낸 것은 좋다.

천천히 살펴보기에 재미도 있다. 남이 쓴 글을 읽어보고 싶은 것은, 일종의 관음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상대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나는 상대를 볼 수 있는 상황에서의 관찰. 먼 과거 우리의 선조로부터 전해진 자연선택의 결과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그 욕구로 인해, 우리는 타인의 낙서를 지나치지 못한다.

책상에 쓰인 낙서를 괜히 읽어보던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라. 길을 가다가 벽에 있는 낙서를 살펴보던 기억도 떠올려 보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경험과 본능으로 인해, 이 작품에는 특수한 향유의 재미가 있는 것이리라.

작가가 만든 가공의 주체가 써내려 간 낙서같은 작품. 아마도 작가 내면을 조금씩 투영할 주체들. 그 생각의 연계가 훌륭하다.

Rio Jee(1986)

이 거울도 특히 신선한 감각을 전한다. FROM RIOPIA. 마치 우리가, 우리의 이상("사람다움과 아름다움, 사랑과 자유가 모든 순간에 스며드는 세계이자, 작가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에서 유래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굉장히 재치있는 작품이지 않은가? 희망적인 태도도 좋다. 그 태도가 작품을 통해 전해진다는 점에서 특히.

2.2. ? 김유정(1986)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이것이다.

김유정(1986)

이 작품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을 것 같은가? 처음에는 플라스틱 실로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모든 고리가 케이블타이로 된 것이 아닌가?

김유정(1986) (확대)

캡션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김유정은 물질의 본질을 '공허'로 바라보며, 이를 시각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물 구조를 작업의 주요 언어로 삼는다. 포근한 스웨터의 털실 사이를 상상 속에서 거닐 듯,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아진 시선은 직물의 빈틈을 광활한 공간으로 확장한다. 반대로 촘촘한 결이 한없이 벌어질 때, 물질은 더 이상 실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듯 보인다. 작가는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물질이란 결국 '텅 빈 것'과 '형태 있는 것'이 맞물린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그물 구조는 이 모순된 본질을 표현하는 장치이자, 공허를 물질로 감각하게 하는 매개체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물질의 존재 여부를 새롭게 질문하며, 당연하게 여겨온 실재의 개념을 낯설게 다시 마주하게 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물질의 본질은 공허이며, 작가는 그것을 그물 구조로 바라보았다.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우리의 세상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거의 텅 비어있다. 원자간의 전기력으로, 마치 용수철이 얽혀 있는 것 처럼 구조를 이루는 것이 곧 물질 아닌가?

하지만 공허를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고리'가 유효한지는 생각을 더 해 보아야 한다. 텅 빈 것과 형태 있는 것의 맞물림을 표현하는데 '고리'는 유효하지만, 그것이 물질의 본질로서의 '공허'를 드러낸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치 수단에 잡아먹힌 것 같다. 공허를 설명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고리 구조가 아닌가?

케이블타이를 사용한 것 또한 악수다. 케이블타이는 아주 강력한 상징으로 기능한다. 태양, 달, 날개, 사랑과 같은 단어와 유사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의 진실을 표현하는데 있어 강한 상징물을 잘 활용하기는 극히 어렵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자신이 정한 매체 안에서, 섬세하게 질료를 선택하고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어떤가? '케이블타이'를 사용한 것에 어떠한 사유가 담겨 있는가? 아니다. 케이블타이가 지닌 구속, 결합, 연결, 옥죄어들어가는 느낌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이 또한 아니다. 그저 작가의 생각이 짧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두고 생각을 이어나가는 과정이 썩 즐겁지 않았다.

캡션의 주장 또한 그렇다. 물질은 텅 빈 것과 형태 있는 것이 맞물린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가장 안정한 지점, 텅 빈 것(원자)들 사이의 전기력이 놀랍도록 낮은 에너지로 평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단단하게 맞물린 물질로 화한다.

전반적으로 작품의 발상부터 사고의 전개 과정과 그 깊이까지, 무엇 하나 좋은 점이 없는 작품이었다. 감상자로 하여금 예술의 향유 과정에서 기존에 하지 못하던 새로운 사유를 불러일으키거나, 아주 강렬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으로 감각을 환기하거나, 하다 못해 수행적인 의미 또는 프로파간다적 의미라도 있다면 작품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평가 할 수 있겠지만... 이 작품에는 가치가 없다. 어떤 측면으로 고려해도 작품의 의미를 발굴해내기 어렵다. 사유가 얕다.

차라리 캡션에서 수행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물질의 상태 정의 부분을 뺐다면 어땠을까?

3. 총평

이름 없는 작품은, 문을 걸어 잠근 집이다. 의도적으로 작품의 이름을 지우고 작가의 이름만을 남긴 것 같은데, 이는 치명적인 실수다. 불쾌하다.


2026-02-27 관람 및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