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1월 1일. 쉬는 날. 일어나자 마자 미술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휴일에 개관하는 곳을 찾아보니, 서초의 한가람미술관이 오늘 영업을 했다. 무엇을 볼 지는 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내 주변에 미술관에 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한 트럭. 미술관에 그나마 방문하는 몇 친구들은 모두 일정이 있었다. 홀로 방문하는 것 보다는 함께 방문하는 것이 훨씬 즐겁기에... 간절히 함께 갈 친구가 있기를 바랬으나 시간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의 전시물은 다섯. 반 고흐 / 카라바조 / 미셸 앙리 / 박진우 / 퓰리처상 사진전. 큰 고민 없이, 입구가 가장 가까운 반 고흐 전시 티켓을 구매했다.
본론
반 고흐를 두고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설명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 문구가 전시장의 후반부의 녹색 빛이 감도는 그림을 두고 사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전시는 반 고흐의 일생을 시간순으로 보여주는데, 1890년경의, 인생 마지막 해의 그림들은 일체가 녹색 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전시실의 입구에는, 반 고흐의 사랑. 인류애를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 부분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나는 분명 그 녹색 빛을 보고 울렁거림을 느꼈다. 이질감. 굉장히 이상한 그림. 마치 푹 썩은 퇴비 냄새를 맡았을 때 느끼는 경고의 감정을 극도로 증폭시킨 느낌을 받았다. 이런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인류애를 논하는가? 마지막 전시실의 설명글을 작성한 사람은 이 그림들을 실제로 관찰해 보았는가? 내 생각에는 전혀 아니다. 학술적인 연보와 평론을 보고 짜깁기 했음이 분명하다.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인류애를 논하는가? 처절한 고통과 돌아버린 세상의 이질감을 화폭에 담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다른 부분의 설명은 좋았다. 연대기적인 전시. 반 고흐의 성장 과정과 정서를 그림으로 느낄 수 있던 좋은 기회였다.
사진촬영 금지인 점이 참 아쉬웠다. 물론 촬영을 한다고 해도, 그 특유의 느낌은 담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장 인상깊었던 그림을 엽서로 판매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구매한 엽서의 사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Sorrowing old man ('At Eternity's Gate')', May 1890 역시 느낌이 많이 다르다. 색감도 좀 다르다. 내 방의 조명이 약간 차갑게 치우친 백색광이라 그럴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슬픔, 혹은 고통, 무언가에 대한 절망은 녹색으로 치우친 색감과 만나며 변질되고 있다. 최소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왜 반 고흐가 녹색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연구를 찾아 본 것이 아니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이 정신적 불안정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강렬한 고통과 슬픔은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깨끗하게 닦아버린다. 그렇기에 이 그림에서는 일종의 부조화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울렁거림은 강렬한 슬픔, 고통, 절망이 주는 정서와, 녹색으로 치우친 색감이 충돌하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넘어서, 난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엽서를 구매할 정도로 말이다. (액자를 만들어서 걸어 둘 예정이다. 완성하면 이곳에 링크를 걸겠다. 링크: '액자 제작' )
이 그림의 이름이 참 좋았다. At Eternity's Gate 라는 부제는 탁월하다. 영원의 문이라니. 일종의 가벼운 조롱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예술로서의 불멸을 바라는 간절함이 무의식중에 드러난 것일 수도 있겠다. 발작 과정에서 느끼는 모종의 감각일 수도, 그림으로 그려졌으니 영원하리라는 따뜻한 위로일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든 좋은 제목이다. 이상한 울렁거림 끝에 남는 슬픔을 닦아내고 있다.
2025-01-01 작성